행복한 이기주의자
이 책은 행복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방법, 현재의 순간을 통제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본인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 욕망, 편견을 다루기 위한 자세를 강조한다. 과거와 미래보단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으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법, 눈치 보지 않는 법, 의무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방법 등을 챕터별로 소개한다. 이 책의 장점은 기본 마인드 개념을 알려줄 뿐 아니라 상황이 벌어졌을 때 무엇이 잘못된 건지, 실제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까지 알려준다는 점이다.
흔하게 자기 계발 서적에서 나오는 말들이 있으니 현실적인 조언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발췌독을 권하고, 타인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고 당당히 본인이 할 말을 쉽게 못 하거나, 안 해도 될 자책과 자기 비하가 있어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는 온전한 완독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사회를 이상할 만치 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사회가 어떠어떠한데, 이건 당신이 가스라이팅 당한 거야’라고 하는 말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모두 무시하고 자신이 잘되는 방향으로 자신을 통제하라는 말은, 잘못 해석하면 본인만 이상세계에서 떠도는 이단아로 만들 여지가 있다. 모두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타인, 세상의 평가를 배제하라는 말은 현실적이지 않다. 만약 사회가 인정할 만한 결과물 없이 자아실현만 갈구하고 본인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행위로 인해서 드높인 자아를 갖게 된다면, 본인이 규정한 자아의 지위와 현실 세계에서 부여하는 사람의 지위 간의 차이가 그동안 외면한 만큼 불어나서 큰 허탈감을 안겨줄 것이다.
(이 문단은 개인적인 견해이며 다른 자기계발 철학을 가진 분들 모두 의견을 존중합니다)
아래의 부분 발췌와 덧붙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본인이 생각하는 것을 과감히 표현하고 현재를 살라’는 메시지를 맥락과 함께 이해한다면 얻어갈 게 많은 책이다.
COMMENT
자기 혐오가 자기사랑보다 더 건전할 수는 없다는 점을 기억하라.
내가 스스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했다 해도
나를 미워하면 무기력과 상처만 안게 될 뿐이다.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긍정적인 감정을 개발해야 한다.
실수에서 배우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노라 결심하되 그것을 자신의 가치와 연결 짓지는 말라.
빠르게 성장하려면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을 탓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나를 되돌아본다면 성장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남 탓은 본인의 자아가 그 사실을 마주하기 힘들기 때문에 자아를 지키기 위한 도피 반응이다. 물론 진짜 온전히 내 탓이 아닌 일도 있고 도저히 마주치기 힘든 상황에서는 피하는 게 맞다고도 생각한다. 최근에 모든 문제를 내 탓만 하려해서 자기혐오가 있었다. 발전된 내 모습에 자부심을 가지려고 노력해야겠다.
기왕이면 부족한 점을 보충해야 할 필요보다는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에 자극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부족한 점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금방 불행해진다. 부족은 100퍼센트 개선되지 않는 한 여전히 부족이고, 성장은 1%만 성장해도 성장이기 때문이다. 부족에 초점을 두면, 개선하려는 시도가 마음처럼 안 됐을 때 ‘왜 이렇게 부족할까? 그래도 시도했잖아.’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마치 합리화하는 느낌이 들고, 의욕은 바닥으로 꺾인다. 반면 성장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번 시도로 ~~한 걸 배웠어! 오 슅 ~~ 꽤 성장했네? 장하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겠어.’라고 말할 수 있다. 맨날천날 본인 자아상을 부족한 사람으로 만든다면 온전한 나를 마주하기 힘들기에 난 오늘도 성장에 포커싱하겠다.
인정을 구하는 일이 나를 망치는 나쁜 습관, 즉 자기실현의 오류지대가 되는 경우는
그것이 희망사항이 아닌 필요조건이 되었을 때이다.
인정을 왜 중요시했는가 생각해보면 내가 가치있다고 여긴 '일'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일을 하면서 능력이 좋아지면 그 너머의 세상이 보이니 또 다른 세상에서 인정 받아야하는 상황이 온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계속 반복된다. 능력주의 세상이기에 사회 혹은 타인의 인정이 나의 역량을 검증하는 수단으로 적용되는 것은 당연하며 희망사항이 아닌 필요조건이다. 더불어 나는 자신이 가치를 부여한 일을 하면서 타인의 반응이 좋을 때, 스스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배움과 가치의 의미를 느끼며 성장하는 것이라 믿는다.
요새 일에 대한 중요도가 높아져서 능력을 벗어난 세상에도 이런 메마르지 않고 높아져만 가는 딱딱한 기준을 나와 타인에게 들여놨던 것 같다. 글을 보면서 일이 아닌 개인으로서 나의 세상에 앞서 말한 생각을 가져온다면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드리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해가 아니라 매번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려는 태도를 기저로 삼기 때문이다. 일과 개인 사이의 명확한 자아 구분은 힘들겠지만 타인의 판단 기준을 개인으로서 나에게 끌고 오지 않는 의도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개인으로서 나를 먼저 가치판단의 엄격한 기준으로부터 내려놓은 뒤 타인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옮겨갔으면 좋겠다.
나의 느낌, 생각, 말, 행동 하나하나에 늘 어느 정도의 반대가 있을 것이라고 마음에 새겨두면
실망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일단 반대를 예상하고 있으면 비난의 말을 들어도 그 때문에 상처를 입지는 않을 테니까.
그뿐 아니라 어떤 생각이나 느낌에 대한 반대를 나에게 핀잔 주는 것으로 여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비난을 듣던 말던 상관없으니 말과 행동을 방종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맞는 답을 찾으려 노력하겠지만 자신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기준에 따른 주관이 있어야하고 이 기준을 수정하는 것이야 말로 삶에 철학을 녹이고 지혜로워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이 기준을 엉뚱하게 잡아서 npc처럼 어떤 틀에 꽉 막혀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당신이 ‘나는 어떻다’ 꼬리표를 불러내면서 과거에 매달린 덕분에 얻을 수 있는 보상은
‘회피’라는 한 마디로 깔끔하게 요약할 수 있다.
어떤 종류의 활동을 피하고 싶거나 성격상의 결함을 덮어버리고 싶을 때면
으레 꼬리표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사실 그런 꼬리표를 많이 사용하다 보면 정말로 그렇다고 믿게 되고,
그 순간 앞으로도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할 운명이 되는 셈이다.
나는 어떤 꼬리표가 있을까 생각해봤다. 원하는 일에 올인하지 못하면 나는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있었다. 어느샌가 나는 놀때면 내가 이럴때인가?라는 압박감을 많이 느꼈고 미래를 위해선 현재를 희생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박혀있었다. 최선을 다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에 답이 No라면, 내가 실패한 이유를 노력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 합리화 할 수 없다는 신념의 강박 때문이다. 어렵겠지만 최선의 기준을 지금까지 최선의 90퍼센트로 낮추고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현재의 낙을 챙기면서 열심히 하자고 다짐해본다. 이렇게 생각하고 노력하다보면 충분히 현재와 미래 둘 다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자책감은 ‘과거’에 행한 어떤 행위의 결과 옴짝달싹 못한 채 현재의 순간들을 잡아먹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걱정은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떤 일 때문에 현재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그 일은 자신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고 자책감을 느낄 수도 없을 터이며,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걱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과거에 매몰되면 후회, 미래에 과몰입하는 것은 불안을 만든다고 했다. 새옹지마라는 말이 떠오른다. 과거와 현재 상황을 초월할 수 있는 말이라서 좋다. 인생만사 새옹지마
걱정은 우리 문화에 만연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터무니없이 많은 현재의 시간을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데 허비하고 있다.
모두가 쓸데없는 걱정들이다.
한 순간의 걱정도 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한다.
걱정이 미래를 더 잘 설계할 수 있게 해주는 영향도 있지 않나? 무의식이 빅데이터상 위험하다고 알려주는 것일 수도. 그렇다면 하나 마나 쓸모없는 걱정인지 아닌지로 1차 쓸데없는 걱정을 거르고, 걸러지고 남은 걱정을 없애기 위해 현재 할 수 있는 행동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되겠다.
누구나 한 번은 부모나 스승으로부터 떨어져나오는 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나 고독의 쓰라림을 얼마간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
부모님과 그 세계로부터, 아름다운 유년의 ‘밝은’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오기 위해
나는 격렬하게 몸부림치지 않았다.
서서히, 그리고 거의 깨닫지 못하는 사이 멀어졌다.
그것은 나를 슬프게 했고, 집에 가 있을 동안 마음 편치 않은 시간들이 많았다.
데미안에 나오는 말을 인용했는데, 지금 내 상황이 당연한 이치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위로받았다. 몸부림치고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경제적인 독립을 지나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아직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지금 어떤 결과를 더 선호하는지를 택하는 단순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내린 결정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하면
다음 기회에 다른 결정을 내릴 생각에만 매여 지내게 된다.
후회는 시간 낭비다.
과거에서 계속 살게 되는 것이니까.
아마도 그 다른 결정이란 앞서 내린 결정이 가져다주지 못했던 결과를 안겨줄 그런 결정일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옳고 그름을 가르는 일에 빠져들지는 말라.
이미 한 결정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의 꼬리표를 붙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현재 상황이 바뀌면 얼마든지 옛날에 선택했던,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지는 틀린 것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선택의 순간에는 분명 다른 선택지보다 더 큰 메리트가 있어서 선택한 것일 테다. 모든 상황에서 옳은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옳은 선택이라는 것은 없을 지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순간에 선택한 결정을 인정하는 자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