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수용소에서는 모든 상황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을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지닌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삶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오히려 마음대로 된다면 노력의 가치는 힘을 잃을 것이고 성취를 위한 인내의 역치가 낮아져 보상에 대한 기쁨은 시시할 것이다. 강제 수용소와는 비교도 못할 감사한 삶을 살아가지만 저마다의 높은 벽에 가로막히곤 한다. 어떻게 태도를 취해서 부수던지 뛰어넘을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이처럼 자유는 무거운 책임과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는 역설적인 단어인 것이다.
그동안의 삶과 현재를 연결시켜 주는 물건 중 과연 남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안경과 벨트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벨트는 나중에 빵 한 조각과 바꾸어 먹고 말았다.
나에게 현재를 연결시켜주는 물건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딱히 물건이 그리 큰 중요성을 가지지 않는 듯하다. 물건보단 관계, 소속, 자유 등의 가치가 더 높다고 생각했다. 며칠간 보상심리로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옷이나 생활품을 소비하려고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진다.
우리 중에서 정신력이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도 맛있는 음식을 다시 먹게 될 그날을 그리고 있었다. 단지 맛있는 음식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가 되면 먹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인간 이하의 상황이 마침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고대하는 이유가 그것 이상의 자유를 맛보기 때문이라니. 나의 기다림 뒤에 마침내 해낸다면 나는 어떤 지평선을 열고 싶을까?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고 싶은 욕심이 많은 나는, 어쩌면 어떤 걸 못본채 살아간다는 말이다. 유한한 인간의 시간적인 한계에 조바심이 나지만, 다른 것은 일부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한계는 내가 하나의 행동으로 여러 이득을 얻을 수 있는 행동만을 고집하게된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게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 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본능을 역행하는 선택은 자유라는 게 무엇인지 알기에 충분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유인 것 같다.
젊은 여자는 자기가 며칠 안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녀는 아주 명랑했다.
“나는 운명이 나에게 이렇게 엄청난 타격을 가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어요.”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그전에 나는 제멋대로였고, 정신적인 성취 같은 것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시련이 주는 깊은 굴곡이 삶에서 더욱 입체감을 가지게되는 요소이며 정신적인 성장을 하기 위한 기회인 셈이다. 한가지 유의할 점은 그 소용돌이 안에서 내면적 자아를 포기하지 않게 반드시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내 삶에 대입해서 생각해봤을 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서 이 장만 몇 번을 다시 읽었다. 수용소의 상황을 대입해보면 이해가 된다.
조금 운명론적인 말이었다. 수용소 안에서의 시련을 운명으로 받아드리고 그런 삶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을 생각하며 행동과 태도로 일반적인 삶의 의미가 아닌 고유의 삶의 의미를 찾고, 독자성을 가짐에 감사하라는 말이었다. 독자성이 주는 이점은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그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니 이 또한 기회라는 것.
책에서는 꽤 낭만적으로 적었지만 까뒤집어보니 이렇게도 애석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라는 문장이 있는데, 해방의 희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삶을 놓지말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박사의 진심을 느낄 수 있다.
운명론적인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 강제수용소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시련이라는 운명은 정해져 있는 듯하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가 그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져왔다.
나쁜 것, 좋은 것들이 모여 우리 존재의 완전함을 보장한다. 결코 판단하지말고 그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이런 진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귀리 수천 포기를 잃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지 못한 일을 당했다고, 자신이 옳지 못한 짓을 행사할 권리가 생기진 않는다는 걸 모르진 않을 것이다. 옳지 못한 일의 기준이 너무 높아졌거나, 도덕보다 그동안의 고생의 가치를 높임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함이 우선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돼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well-being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한 발은 이뤄놓은 곳에 한발은 미지의 곳에 딛고 어느 곳에도 쏠리지 않을 때야말로 불안하지 않고 발전하는 존재가 되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은 미지의 곳으로 조금 쏠린 것 같다. 불안하다면 여태까지 이뤄놓은 것들을 보자!
환자들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그들은 내적인 공허, 자신 안의 허무가 늘 따라다니는 것을 느낀다. 앞에서 내가 ‘실존적 공허’라고 얘기했던 바로 그런 상황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삶에 의미가 왜 중요한지 이 책을 통해 깨닫고 있다. 오늘 목표를 다시 상기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엄청난 활력으로 다가왔다. 내가 되고싶은 나 자신, 시간/돈/관계로부터의 자유를 생각하며 설렜다. 출근하기 위해 정신없이 승차한 2호선의 아침 지하철에서, 한강의 일출과도 같은 단비였다.
따라서 삶이 일회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삶의 일회성이 우리 책임 아래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일회적인 잠재 가능성을 우리가 어떻게 실현시키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수많은 현재의 가능성 중에서 끊임없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을 무위로 돌리고, 어떤 것을 실현시킬까?
어떤 선택이 단 한 번의 실현을 ‘시간의 모래 위에 불멸의 발자국’으로 만들 것인가?
언제나 인간은 좋든 싫든 자기 존재의 기념비가 될 만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어떤 선택으로 어떤 과거를 간직할 것인가? 어떤 과거가 쌓였을 때 쌓인 것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면 좋겠는가? 와 같은 접근이 신선하다. 내가 선택한 시간의 경험들만 가질 수 있다는게, 즉 다양한 경험을 못하는 게 아쉬웠는데 이렇게도 바라볼 수 있었다니. 나도 이렇게 생각해야겠다. 내가 했던 일과 사랑, 이겨냈던 고통의 증표를 고이 쌓아올려보자.